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맨해튼 계획 (문단 편집) == 과정 == 1939년 [[헝가리]] 출신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Szilárd Leó, 1898~1964)[* [[헝가리인]]이라 '실라르드'가 성이다. 책마다 실라드, 질라르드 표기가 따로 논다.]가 주장하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쓴 편지에 의해서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처음엔 자그마한 연구 프로젝트에서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는 13만 명 규모[* 이는 연구, 실험 장소를 건설한 공병, 경비 병력, 연구 시설의 잡역 종사자들까지 모두 포함한 수치다. 실제 직접적인 연구를 수행한 인력은 5,000명 가량이며, 이 중 2,000명 정도가 자연과학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였다. 20세기 초반까지도 서구 대학에선 박사 학위 소지자가 그리 많지 않아 석사 학위 소지자나 박사 과정 재학생이면 전임 교원으로 임용될 수 있었던 상황을 감안하면, 북미 지역의 자연과학 분야 전문가들을 총동원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까지 성장했고, 프로젝트에 쏟아부은 비용은 당시 돈으로 20억 달러[* 당시 M4 셔먼 전차의 평균 가격이 $47,000으로 약 43,000대 생산이 가능한 금액이다. 당시 이 엄청난 비용은 군사비밀로 숨기고 있었는데 만일 핵폭탄이 실패하거나 성공하더라도 결과가 공개되지 않는다면 의회에 알려지게되어 추궁당할 사안이었다.][* 1945년 미국의 GDP가 총 2280억 달러였다. 단일 프로젝트에 GDP의 1% 정도의 어마어마한 거액을 쓴 셈.], 2023년 기준으로 따지면 330억 달러, 즉 [[대한민국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으로 2023년 한국 총 국방 예산(약 57조 원)의 70% 정도의 거액이 들어간 거대 공학 프로젝트이다. 특히 [[로스 앨러모스]] 연구소장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시작으로 [[닐스 보어]], [[엔리코 페르미]], [[존 폰 노이만]],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 등 전 세계에서 긁어모은 당대 최고의 두뇌들을 모두 여기에 [[공밀레|동원했다.]][* 공교롭게도 참여한 과학자들의 상당수가 유태인이었다.(페르미의 경우는 아내가 유태인) 이들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했거나, 나치가 2차대전에서 승리할 경우 가장 큰 피해자가 될 입장이었고, 때문에 더욱 열성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에 동참했던 것이다.] 비록 아인슈타인 본인은 이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루즈벨트 대통령을 설득하는 편지(실라르드가 쓴 내용)에 서명해 자신의 권위를 빌려주는 방식으로 공헌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우라늄]]의 유통을 중단하면서, 미국은 독일이 핵무기의 개발을 시작하였다고 판단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이 작전을 허가했고,[* 처음에 루스벨트와 독대하여 핵무기 개발의 중요성을 전달하는 자리에서 [[닐스 보어]]는 중언부언 늘어놓는 대신에 [[로버트 풀턴]]의 [[증기선]] 개발 지원을 거부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이야기를 하였다. 기술에 대한 무지가 결국 전쟁의 패배로 이어진다고 암시했던 것. 이에 루스벨트는 아무 말 없이 그 이야기를 들은 후 바로 맨해튼 계획을 허가해준다. 단, 여기선 닐스 보어가 설득을 위해 꺼낸 이야기이지만 역사학의 관점으로 보면 이런 비유는 정확하진 않은게, 나폴레옹에겐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 문서 참조.] 루스벨트 사망 후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은 이 프로젝트를 알자마자[* 다시 말해 부통령도 모르던 기밀 프로젝트였다. [[http://www.ushistory.org/us/51f.asp|출처]] 사실 트루먼은 대통령 이전 국방사문위원회 위원장 시절에 이 프로젝트에 대해 알 뻔한 적이 있었다. [[https://www.dogdrip.net/504022938|#]]] 최대한 빨리 핵폭탄 개발을 완료할 것을 촉구했으며 ''''나치 독일로부터 미국과 유럽을 지키기 위해''''라는 목적으로 예산이 무한정 지원되는 거대한 프로젝트가 이루어졌다. 엄청난 힘을 가진 핵분열을 인간이 마음대로 다루는 것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하고 실제로는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일류 학자들 수천 명이 수년간 함께 연구한 결과, 그 가능성은 점점 실체화되었다.결국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의 [[https://goo.gl/maps/QaiYftXWKWP2|폭격연습장]]에서 인류 최초의 핵폭탄 실험이 성공리에 종료되었는데, 이 역사상 최초의 핵실험의 이름은 [[트리니티 실험]]이었으며, 사용된 폭탄의 이름은 가젯(gadget)이었다. 맨해튼 계획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군사작전이었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의 명목상 총 책임자는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아닌 [[레슬리 그로브스]] 미 육군 소장이었다. 오펜하이머는 총 책임자가 아니라 로스 앨러모스의 연구소 소장 신분이었다. 물론 [[핵폭탄]] 자체를 개발하는 이론-기술 분야 전반에 대해선 [[과학자]]들이 전적으로 끌어갔고 그 과학자들을 이끌어 핵폭탄을 개발한건 오펜하이머가 맞지만, 프로젝트 전체의 총괄 지휘, 즉 인력 확충이나 예산 반영, 보안 유지, 부지 및 원료의 계약 부분 등은 그로브스가 맡았다. 사실 그로브스도 군 생활 전에는 한때 [[MIT]]에서도 공부했을 정도로 이공계 분야의 지식이 제법 있던 군인이었고 이게 프로젝트에 손해는 아니었지만, 이론 물리학은 그의 전공이 아니었고 양자역학 분야는 더더욱 몰랐다. 그로브스는 미 육군 공병단 소속으로, [[대령]] 시절 미국 전쟁부의 새로운 청사인 [[미합중국 국방부 청사|펜타곤]]을 6개월이라는 가공할 속도로 완벽하게 건설해냄으로써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 공로로 [[준장]]에 진급하고, '''"펜타곤 잘 만드는 솜씨를 보니 원자폭탄도 잘 만들겠군?"'''이라는 상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면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총 책임을 맡았다. 저 기대가 무슨 드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로브스 임명에 저 부분이 작용했다. 그로브스가 펜타곤 건설 과정에서 보여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엄청난 추진력과 실제 성과 때문에 그를 임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상부의 기대에 걸맞게 맨해튼 계획을 성공시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